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략 폭격/2차 대전 (문단 편집) ==== [[폴란드 침공]]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mpol_bombing.jpg|width=500]] 프람폴 폭격 당시 사진. 왼쪽의 도시가 폭격 한 번으로 오른쪽의 석기시대가 되었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 직후 공중폭격으로 폴란드의 제반 시설을 완파하기로 계획하는데, 여기에는 병원, 학교 등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피난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바르샤바]], 비엘룬, 프람폴에 행한 전략 폭격이 유명한데, 이 중 프람폴의 경우는 군대가 전혀 주둔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전략 폭격 전술 평가용 [[마루타]]였다. 군부대가 일절 주둔하지 않았기에 대공포 같은 방어 시설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도시 규모도 작은 편이 아니라 폭격이 빗나갈 염려도 없었기 때문. 즉, 폭탄의 성능 실험도 함께 진행할 수 있었던 안성맞춤의 [[마루타]]였다.[* 이 폭격으로 도시 전체의 60~90%가 파괴되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남아난 건 두 개의 작은 도로 뿐.] 물론 이 작전의 대외적인 목적은 '폴란드 공군을 제압하여 독일 폭격의 가능성을 막는다'였고, 여기에 폴란드의 제반 시설을 파괴하여 증원군을 봉쇄하고 독일 육군을 돕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비록 앞에 언급된 루즈벨트의 제안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임에 따라 공식적인 [[바르샤바]] 폭격 작전은 취소되었으나, 지속적으로 도시 상공에 나타난 독일 공군기들은 시민들에게 기총 소사를 해댔으며 병원 마크가 달려 있는 건물을 폭격했고, 심지어 묘지에까지 기총 소사를 퍼부었다. 전쟁 초반 폴란드 측에서는 병원 마크를 걸어두면 폭격을 안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당해버린 셈. 여기다 피난민 행렬에 기총 소사를 퍼붓는 행위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대외적으로 [[나치 독일]]은 당시 바르샤바는 요새화되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말 그대로 변명인 것이, 바르샤바에는 이렇다 할 군사적 시설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9월 8일 독일군이 시 외곽에서 진주하여 공격할 때 바르샤바에는 4개 보병대대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패배하고 이 패배를 감추기 위해 바르샤바를 강력한 요새로 선전한 것.] 지속된 나치 독일군의 전략 폭격은 폴란드 교통망을 마비시켜 폴란드군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데 성공했으며, 민간 시설에 대한 지속적인 타격은 폴란드군의 지휘 체계 또한 흐트러뜨렸다. 조종사들의 실력은 수준급이었지만 숫적으로나 기체 성능으로나 열세였던 폴란드 공군은 독일 공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침공 첫 날 바르샤바에 행해진 독일군의 폭격은 해당 지역을 방어하던 폴란드 공군의 추격 여단의 분투로 막아냈지만 계속된 소모전으로 인해 추격 여단은 동부 지역으로 옮겨졌다. 폴란드 공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기체들이 추격 여단처럼 공중에서의 계속된 격전 끝에 소모되었다. 9월 13일에는 바르샤바 유태인 거주 지역에 독일 공군의 공식적인 폭격이 있었다. 이 때 명분은 이 당시 독일군 병사들에 폴란드군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즉, 완벽한 테러 폭격이었고, 50:50으로 고폭탄과 소이탄을 섞어 폭격해 이 지역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실제로 9월 22일에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사령부에 요청한 전보 내용이 바로 이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기 위해 더 많은 폭탄을 달라는 것이었으니… 이 요청은 당시 무시당했으나, [[히틀러]]는 바르샤바에서 민간인들이 피난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를 봉쇄하고 지속적으로 폭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려 폴란드의 항복을 노렸다. 이 당시 프랑스군의 정보에 따르면 독일군의 폭격이 민간인을 노리지 않았다고 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을 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정보국은 이러한 폭격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설이 중론이며, [[프랑스 침공]] 항목에도 나오듯이 이 당시 프랑스는 전쟁에 휘말리는 걸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러한 보고를 올린 프랑스쪽 요원은 이 폭격이 있기 전에 폴란드를 떠나버렸기 때문. 더욱이 이러한 보고가 처음 수면에 드러난 것도 1948년으로, 전쟁이 이미 끝나버린 후였다. 때문에 정치적인 입김이 매우 강하게 들어가 있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어쨌든 독일은 이렇게 폭격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바르샤바 시내에 지속적으로 민간인들에게 피난할 것을 요구하는 찌라시를 뿌려댔고, 서부 유럽 전선을 준비하느라 수송기인 Ju52를 동원해 폭격하기 시작하여 정확도가 더더욱 떨어지게 된다. 이게 문제가 된 이유는 폴란드 시민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도시 근처에 주둔중이었던 독일군들이 [[팀킬]]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폴란드군도 독일 영내의 공장 등 산업시설을 폭격해보기는 했으나 그 당시 썼던 기종이 PZL.23 Karaś 같은 단발 기종이었으므로 큰 효과는 없었고, 9월 17일 이후 소련군이 몰려와 동부에 그나마 남아있던 공군 시설물들을 전부 점령당하는 바람에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